이제껏 뭐했는지
서론
오늘은 2023년의 마지막 날이고, 공식적으로 포필러스의 일원으로써의 마지막 날이기도 하다. 이제껏 개인적인 연간 회고 글을 작성하지 않음은 아직 회고를 할만큼의 뭔가를 만들어내지 않았고, 더 달려야할 시기라고 판단하였기 떄문이다. 근데, 그 판단은 내가 하는걸까? 아니면 남들의 판단을 내가 어림짐작하는 것일까? 어쨋든, 결과적으로 쉼표를 찍게 된 지금, 그래도 중간에 한번의 매듭을 짓고 넘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하였다.
근데, 회고는 언제부터 해야할까? 나는 개인적인 회고의 시작 지점을 그래도 내가 뿌듯하게 생각하는 지점부터로 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2020
고등학교 때 처음 FL Studio를 접한 이후로, 취미로 비트를 만들곤 하였다. 당연히 거창하진 않았고, 그냥 재미로 만들고, 내가 만족하고, 친구들한테 들려주고, 인터넷에 올려보고, 그게 다였다. 그렇게 이어온 취미를 2020년 코로나 시즌에 남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본격적으로 한번 열심히 해보고, 내가 재능이 있는지/없는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1년의 결과물은 공식적으로 퍼블리싱된 곡 총 6개, 2023년 12월말 기준으로 총 4832원의 저작권료를였다. 총 34개월 동안 4823원을 받았으므로, 2068년 쯤에는 KOSCAP(저작권 협회) 등록비 10만원을 메꿀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저작권료 외에도 비트 판매 등으로 돈을 받기도 하였지만, 결론적으로는 재능의 한계가 느껴졌고, 군 입대와 함께 그만두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해당 기간 동안 했던 여러 활동들이 이후에 큰 도움이 되었다.
- 배움의 가이드라인을 직접 만들기: 사실 이전까지는 학원이나 학교에서 뭐를 배울지부터, 어떻게 배울지의 가이드라인을 미리 만들어서 나는 섭취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비트 메이킹이라는 것은 내가 직접 배워보기로 마음먹고, 유튜브에서 뭐를 어떻게 배울지부터 나만의 가이드라인을 만들어나가면서 학습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나름대로 실력이 나아지는 것을 보면서, 가이드라인이 없는 상황이나 학문에서의 학습에 대한 거부감이나 두려움이 줄어들었던 것 같다.
- 거창하진 않더라도, 내 것을 만들어보기: 내가 만든 비트가 남에게 사용되어서 완성된 곡으로써 세상에 나오는 일은 꽤 뿌듯한 일이었다. 그 곡이 전혀 성공하지 못하고, 나도 잘 안들을정도로 구리더라도, 어쨋든 나로 인해서 세상에 없던 것이 새로 나왔다는 것은 신선한 경험이었다.
- 콜드 컨택을 많이 해보기: 아마추어 비트메이커들은 자신의 비트가 쓰임을 당하기 위해서 수많은 아티스트들에게 콜드 컨택을 해야만 한다. 나 역시 해당 과정을 거쳤고, 한동안은 매일 최소 5명에게 콜드 컨택하는 기간도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경험은 내가 콜드 메일이나 컨택을 덜 두려워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2021.09- 2022.10
2021년도 공군 입대를 하고 나서, 처음 몇 개월은 군대 적응, 그 뒤 몇 개월은 프론트엔드 코딩을 공부하다가, 9월 정도부터 개리 겐슬러의 MIT 강의를 시작으로 블록체인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2021년 12월부터 개인 공부 겸 해당 산업에서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서 ‘Why Matters’라는 블록체인 뉴스레터를 시작하였다. 현재는 워낙 한국에도 좋은 블록체인 리서처분들이 너무 많았지만, 당시에는 해외에 비해서 그 수가 현저히 적었고, 그래서 상대적으로 빠르게 이름을 알릴 수 있었던 것 같다. 관심있는 주제가 생기면 약 2주의 기간을 잡고, 1주는 관련 자료 조사, 나머지 1주는 아웃라인 및 본문 작성을 진행하였다. 당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16비행단의 분위기와 흔쾌히 글 홍보에 도움을 주셨던 CoinEasy님을 비롯한 여러 관계자 분들이 없었더라면, 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
해당 뉴스레터를 운영하면서 총 32개의 글을 작성하였고, 글 당 평균 뷰어쉽은 0.5k - 2k, 총 구독자는 534명, 뉴스레터 총 뷰어쉽은 약 29k을 기록하였다. 각 아티클을 섭취하는 시간이 30초라고만 해도 나는 사람들로부터 약 241시간을 소비하게 만들었고, 이는 꽤 뿌듯한 일이다. 이후 군을 전역하고, A41에 인턴으로써 합류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뉴스레터 활동은 줄어들었다.
해당 기간은 과거 비트 메이킹을 하면서 배웠던 경험들을 알게 모르게 써먹는 기간이었던 것 같다.
- 상대적으로 블록체인은 여러 학문이 겹쳐진 산업이기도 하고, 역사가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에, 배움의 정식적인 커리큘럼이랄 것이 없는데, 과거의 경험들이 이에 대한 거부감 없이, 상대적으로 적은 스트레스로 헤쳐나가는데 도움을 준 것 같다.
- 사실 배우는 과정 중에 글을 써서 남들에게 공유한다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고,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과거에 나의 실력이 뛰어나지 않더라도, 나만의 것을 만들고, 공유하던 경험들이 블록체인 산업에 대해서 잘 모르더라도, 배우면서 뉴스레터를 시작하는데에 대한 부담감을 낮춰주었다.
- 이전의 콜드 메일/컨택의 경험을 통해서 나는 처음 뉴스레터를 시작하고, 한동안 내 글을 업계 관계자분들에게 뿌리곤 하였다. 이를 통해서 맺은 인연은 나와 내 뉴스레터를 알리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2022.10 - 2023.03
앞서 뉴스레터를 운영하면서 얻게 된 인연으로 한국의 탑 블록체인 인프라 회사인 a41에서 인턴 - 프로토콜 스페셜리스트로 일하게 되었다. 이전에는 블록체인 산업 전반에서 내가 관심있는 분야들을 탐색하였다면, a41에서는 코스모스 생태계, 거버넌스, 새로운 체인 발굴 등의 나름 정해진 롤을 맡았다.
해당 기간동안 총 6개의 글을 작성하였고, 뷰어쉽의 경우, 거버넌스에 대한 글은 평균적으로 100-200, 그 외의 글들은 평균적으로 1.5k 정도 나왔다. A41 동안 배웠던 것은 다음과 같다.
- 회사에서 일한다는 것: 상대적으로 a41은 매우 자유로운 회사임에도 불구하고, 나의 경우, 첫번째 직장이었기 때문에, 회사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한다는 것이 뭔지 처음으로 경험해봤다. 처음 직장 생활이었기 때문에, 매우 미숙하였지만, 그럼에도 좋은 분위기에서 업무를 할 수 있게 도와주신 a41 동료분들에게 감사함을 전한다.
- 거버넌스에 대해서 생각해보기: A41은 밸리데이터회사였고, 거버넌스 팀에 내가 소속되어있었기 때문에, 거버넌스에 대해서 많은 리서치를 할 수 있었다. 사실, 거버넌스란, ‘좋은 의사결정 내리기’를 멋있게 포장한 말인데, 이의 중요성은 비단 블록체인에 한정되지 않기에, 우리 삶과 사회 전체에 적용되기 때문에, 더 다양한 주제들에 관심을 갖게 된 원인이 된 것 같다.
- 후각 기르기: 새로운 블록체인 발굴 업무를 맡으면서 어떻게 하면 남들보다 더 빠르게, 유망한 블록체인을 찾을 수 있을지 많은 고민을 하였고, 이는 결국에 1) 빠르게 정보를 수집하고, 2) 필요한 정보만 추출하고, 3)나만의 유망함이 뭔지 훈련하는 과정이 되었다. 이는 비단 블록체인 산업에만 적용되는 스킬은 아닌 것 같다.
2023.06 - 2023.12
앞선 회사를 퇴사하고, 다시 학교에 복학하야 다니던 와중에 블록체인 리서치 회사를 함께 창업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게 되었다. 리서치와 창업, 이 2개 모두에 관심을 갖고 있던 나로써는 너무나도 좋은 기회였고, 그렇게 포필러스를 함께 하게 되었다. 12월 31일부로 퇴사를 하면서 돌아보면, 창업의 과정은 힘든 시간도 많았지만, 다시 생각해봐도 이런 경험을 해볼 수 있었던 것은 매우 럭키한 일이었던 것 같다.
나는 크게 두 가지 업무를 수행하였는데, 리서처로써는 온체인 게임을, 공동창업자로써는 재무/회계 부분을 담당하였다. 문제는 두 업무 모두 처음해보는 것들이었다. 포필러스 이전까지 나는 온체인 게임을 포함한 게임 전반에 대해서 큰 관심이 없었고, 재무/회계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쨋든, 지금 돌아보면, 둘 다 하기는 했지만, ‘잘’ 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래도 지난 기간 동안 총 19개의 글을 작성하였고, 처음으로 연사로써 발표도 하고, 처음으로 해커톤에서 친구들과 수상하는 등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가장 큰 배움이라면, 역시 창업을 직접 해보면서 얻게 된 경험이 아닐까 싶다. 창업을 단순히 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에서 직접 해보게 되면서 느낀 여러가지 교훈들은 아마 나중에도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직접적인 내용들은 밝힐 수 없지만, 과연 내가 창업에 적합한 성향을 가졌는지, 하나의 의사결정이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이라던지, 현실과 이상의 차이라던지, 다양한 부분들에 대해서 정말 값진 경험을 하고, 나 자신을 조금 더 잘 알아게 된 것 같다. 이러한 경험을 할 수 있게 도와준 공동창업자 3분과 포필러스 소속원들에게 다시 한번 고마움을 전한다. 나의 오프보딩과 별개로 포필러스는 계속해서 최고의 블록체인 리서치 회사로써의 행보를 이어나갈 것이기 때문에, 나 역시도 팬으로써 계속해서 지켜볼 것이고, 이 글을 읽는 사람들도 계속해서 많은 관심과 응원을 해주시면 좋을 것 같다.
내년에 이루고 싶은 목표 한 가지
내년에 이루고 싶은 목표 한 가지를 꼽자면, 다른 사람과의 비교, 또는 다른 사람의 생각에 최대한 덜 신경쓰는 것이다. 점점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점점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나 전반적인 사회의 분위기에 나를 맞추기가 쉬워지는 것 같다. 그렇다고, 일부로 엇나가거나,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할 생각은 없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 내가 좋은 것, 재밌는 것들에 더 집중하고 싶다는 의미이다.
짧은 주체적 삶 동안 벌써 ‘다르게 했으면 어땠을까’하는 의사결정들이 존재한다. 그 의사결정들 중에서 내가 전적으로 내린 결정도 있는 반면, 다른 사람에 대한 눈치나 의견 반영으로 인해서 내린 것들도 존재한다. 전자들의 경우, 앞으로 줄일 생각이 없고, 후자들은 줄여나가고 싶다.
한 페이즈가 마무리된다고 느껴진 최근, 다음 페이즈를 위하여 명확한 미래를 빠르게 정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굳이 급하게 정해야하나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명확한 커리어 패스를 정하려고 했던 이유가 뭔가 남들보다 뒤쳐질까봐, 혹은 남들은 다 잘 앞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때 ‘아 의식적으로 남 신경 안쓰기를 하지 않으면, 점점 자연스럽게 스며들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래서, 더 능동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 관심있는 것, 재밌는 것을 쌓아나가기 위해서 새롭게 뉴스레터를 해보려고 한다. 해당 뉴스레터의 주된 목적은 나의 취향을 찾고, 길러나가는 것이다. 좋아하고, 재밋는 것을 적극적으로 찾고, 잘 기록하다보면 나만의 취향을 더 잘 기를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앞으로는 좋은 취향이야말로, 인간 간의 가장 큰 차별화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인터넷을 통해서 정보의 유통에 대한 비용이, AI를 통해서 정보의 생산에 대한 비용이 급감하면서, 이제는 어떤 정보를 잘 고르냐의 게임이 되었다. 예를 들어, 출근할 때 고르는 음악부터, 커서는 어떤 직업을 골라야할지, 어떤 가치관으로 살아가야할지, 모든 의사결정의 가장 출발점에는 개인의 취향이 존재한다.
따라서, 새롭게 시작하는 뉴스레터의 경우, 위 의의를 제외하면, 주기와 분야를 모두 미정으로 두려고 한다. 혹시나 이러한 내용의 뉴스레터가 흥미롭다면, 어서 새롭게 구독하기를 바란다.
마무리
지난 약 3년을 되돌아보면, 뭔가가 느껴질까 싶기도 하였지만, 딱히 그런 것은 없는 것 같다. 그냥 내년에는 더 다양한 것들에 호불호를 가져가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